램버스 D램은 인텔이 펜티엄4와 함께 도입하려고 했던 새로운 아키텍처의 메모리이다.
당시 주력으로 사용되던 메모리는 SD램이었는데 이후 램버스 D램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DDR램을 사용할 것인가로 갈리던 시절이었다. 인텔이 램버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램버스의 승리가 좀더 예견되고 있었다.
램버스D램과 DDR램의 차이점은 간단하다. DDR램은 기존의 SD램과 거의 모든 면에서 구조적으로 동일하며 단지 클럭을 올렸을뿐이다. 그러나 램버스D램은 통신 선 숫자를 줄이고 그대신 통신속도를 끌어올려서 고속 시리얼 통신을 사용하려고 했다.
당연히 램버스 D램의 기술적 방향성이 올바르다고 느껴진다. 여러가닥의 통신선을 사용한 패러렐 통신이 고속 시리얼 통신으로 교체된 것은 메모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버스 프로토콜에서 마찬가지의 역사였다. USB가 그랬고 SATA가 그랬고 PCI가 그랬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메모리 버스는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버스중에서 가장 높은 대역대를 필요로 하는 버스이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멀티코어 처리를 위해서 CPU 내부에 더욱 빠른 버스가 존재한다) 그런 대역폭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굉장한 고클럭을 필요로 했다. 램버스 D램의 동작 클럭은 800Mhz였다. SD램이 133Mhz이고 DDR램이 266Mhz이던 시절이다. 즉 기존 대비 6배 이상의 고클럭을 필요로 했다는거다. 800Mhz면 동시대 CPU들의 동작 클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CPU들과 제조단가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거다. 한마디로 오지게 비쌌다는거다. 다만 대량양산을 하면 가격이 싸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가격은 싸지지 못했다. 필요한 대역폭을 구현하기 위해선 너무 높은 클럭을 필요로 한 것이다. 즉 높은 클럭을 구현하기 위해선 높은 수준의 공정을 사용해야 하므로 코스트가 너무 많이 요구된다는걸 간과한 것이다. 가격과 성능의 밸런스를 맞출 수가 없다는거다.
아무리 좋은 기술도 비싸면 사용되지 않는다. 램버스 D램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2년의 혼란끝에 램버스D램은 폐기처분되고 대세는 저렴한 DDR로 바뀌었다.
이때 램버스D램에 투자했던 기업들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했고 새로운 투자가 늦어져서 시장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때 삼성은 가장 먼저 DDR을 대량 양산했고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삼성의 대표적인 경영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그런데 요즘은 이 사례가 다소 와전되어서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삼성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다른 기업들이 램버스 D램이라는 지뢰를 밟을때 삼성만 혼자만 이걸 피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사실이다.
삼성 역시 이 지뢰를 밟았다. 그것도 아주 세게 밟았다.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000516/7535876/1
이 기사를 보자. 2000년 5월 기사이다.
당시 램버스 D램의 세계 전체 생산량이 월 500만개인데 삼성이 월 200만개를 생산한다고 되어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생산량을 월 300만개로 증설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얘기냐? 삼성이 램버스 D램에서도 점유율 40%를 달성하고 있었다는거다. 한마디로 세계 1위였다는거다.
삼성 역시 램버스 D램으로 피해를 크게 보았다. 다만 삼성의 장점은 램버스 D램에 이렇게 투자를 하면서 동시에 DDR에도 똑같이 투자를 하고 있었다는거다. 한마디로 2중 투자다. 그래서 다른 업체들이 버벅거리고 있을때 혼자 튀어나갈 수 있었던거다.
삼성을 보통 패스트 팔로워라고 하는데 난 이게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은 그렇게 똑똑한 기업이 아니다. 패스트 팔로워라고 할려면 흐름의 전환에 민감하고 정확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빠르게 판단하고 쫓아가야만 또 그 방향성이 들어맞아야만 [패스트]라고 해줄 수 있다는거다. 삼성은 그런 식으로 스마트하게 경영하지 않았다. 삼성은 올 팔로워라고 해야만 한다. 뭐가 성공할지 모르겠으니까 전부 다 찍먹해보는거다. 그래서 뭐가 성공하든간에 쫓아갈 수 있다는거다. 이게 삼성의 정체성에 가깝다.
굉장히 무식하고 손해가 큰, 하지만 실패 가능성이 적은 겁쟁이 전략이다. 이런 다양한 찍먹의 과정에서 비용의 손해가 크다. 아마 보통의 회사라면 비용절감 소리 엄청 듣고 경영진이 교체될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했던건 창업주의 뚝심 때문일것이다. 당장 1분기 1분기의 실적에 민감한 경영진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삼성의 이러한 전략은 스마트폰 교체기에도 작동한다.
스마트폰은 뜬다! 이건 진작부터의 대전제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스마트폰 시대는 온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다. 다만 언제 어떤게 대세가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삼성의 전략은 뭐다? 전부 다 해보는거다.
삼성은 그야말로 전부 다 해봤다. 모든 종류의 스마트폰 OS를 진작부터 전부 다 찍먹해서 제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 시도의 역사는 2001년부터 시작된다.
PalmOS? 써봤다.
셀빅? 써봤다.
심비언? 써봤다.
WinCE? 써봤다.
윈도우 모바일 6? 써봤다.
윈도우 폰 7? 써봤다.
자체 타이젠 OS? 시도해봤다.
그것도 다 굉장히 이른 시기에 써봤다. 이게 괜찮더라 그러면 바로바로 따라간 것이다.
근데 웃기게도 삼성이 딱 하나 늦게 시작한게 있는데 그게 바로 안드로이드다.
이때는 삼성이 괜히 고집부리면서 미래는 이것이다라고 잘못 판단하던 시기였다.
삼성은 윈도우 모바일 6를 커스텀한 옴니아에 그야말로 몰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나마 옴니아가 아이폰에게 일찍 두들겨맞고 쓰러진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이폰 도입이 1년만 더 늦어졌어도 옴니아는 그럭저럭의 성공을 거뒀을거고 그러면 삼성은 옴니아로 좀더 버티려고 했을거고 그럼 안드로이드 시장 진입이 늦어져서 스마트폰에서 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LG가 성공했을 것 같지도 않다는게 참...)
아 삼성이 안드로이드에 진입한 이후의 발전속도를 보면 확실히 패스트라고 해줄 수 있기도 하다. 그때 같이 진입했던게 LG, 소니, HTC, 모토롤라 정도인데 (팬택은 좀 늦다) 다른 그 어떤 기업보다도 삼성의 제품 발전이 조금 더 빨랐다. 갤럭시S3가 괜히 전세계적인 히트를 한게 아니다. 쿼드코어, 2GB 메모리, 4.8인치 HD해상도 스크린.. 모두 시대를 압도하는 사양이었다. 이거 너무 오버스펙 아닌가 싶었던게 바로 출시시점의 S3다. 그만큼 혼자 앞서갔던거다.
아 얘기가 한참 빠져버렸는데 하여튼 스마트폰에서도 삼성의 전략은 전부다 찍먹이었다는거다.
다만 웃기게도 결정적으로 안드로이드만 찍먹을 하지 않았다... 삼성이 만약 스마트폰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하필이면 안드로이드만 찍먹을 패스해서... 가 되었겠지 상당한 흑역사 취급 받았을법 하다.
이런 삼성의 전략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삼성은 HBM 연구 투자를 2001년에 포기했다. 찍먹을 포기했다는거다. 왜냐? 당장 돈이 안되니까. 나중에 쫓아가려고. 그래서 실패했다. 패스트 팔로워는 허상이다. 나중에 쫓아가면 무조건 늦는다. 쫓아갈 수가 없다. 삼성이 패스트 팔로워처럼 보였던건 미리미리 살짝 일찍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 쫓아갈 수 있었던거지.
이번 삼성의 실패는 여러가지를 시사한다고 본다.
스마트폰 개발사와 비교를 했을때 삼성은 옴니아에 전력투구하던 것과는 별개로 안드로이드 찍먹도 동시에 어느정도 준비는 하고 있었을거다. 옴니아 마케팅에 상당히 힘을 쓰기는 했지만 옴니아로 아이폰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설마 안했겠지...
하지만 HBM은 다르다... 안드로이드가 단지 준비를 시작한게 좀 늦은 정도였다면 HBM은 아예 완전히 접었다가 결과가 나온 다음에 뒤늦게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방심 그 자체이고 옛날의 삼성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성은 변할까? 글쎄... 내가 보기엔 좀 무리 아닐까... 옛날의 삼성으로 돌아가는건 무리다.